병자호란 인조 소현세자 독살을 진짜 지시했을까?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연인” 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다시금 인조와 소현세자간의 이야기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부분 중에 하나인 병자호란 그리고 가장 무능하고 비겁한 왕이라고 인식되어 있는 인조 그런 인조가 자신의 아들 까지 독살 했다는 사사로 각종 영화와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역사입니다.
거대 중국 자본의 투자를 받고 억지스러운 중국색을 입혀서 문제가 되어 방여 2회분만에 폐기되어 버린 “설강화” 의 트라우마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드라마 연인 시청률 최고 12.2% 까지 찍으며 방영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알고 보면 더욱 재미 있는 컨텐츠이니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병자호란 인조
정치적 배경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공표하였다. 이에 격분한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사건은 후금과 강화조약을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고 있는 조선이 눈엣가시였고, 자신들의 뒤가 찝찝한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고,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며 조선을 압박하였다.
전쟁의 직접 원인
1636년 2월 후금은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 사신 접견을 거부하고 후금과 결전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조선은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적으로 묵살하였다. 이에 홍타이지는 분개하였다.
역사의 시작 ‘남한산성’
결국 병자호란이 터졌고, 제대로 준비가 안된 조선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결국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은 지리적으로 수비하기에 꽤 좋은 지역이기에 효과적으로 수비를 할 수 있었고, 전국 8도에 군사를 모집하도록 하고, 명나라에는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1637년 1월 1일 드디어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남한산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 정도만 있을 뿐이었고, 군량미등은 두달을 버티지 못할 정도의 식량만 남아 있었다. 의병도 쉽게 모이지 않았고, 이미 쇄해버린 명나라의 원군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성 밖에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청나라 군은 무자비하게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았고, 부모들은 잡아다가 일을 부리거나 가둬두니 밖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얼어죽었다.
이 당시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심했고, 오래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결정 하였다.
삼전도의 치욕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하고 청나라 태종이 허한 후에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항복 조건은 인조가 직접 와서 엎드려 절하고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고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을 것.
-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 명나라를 공격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 앞으로는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높이지 말 것.
-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금을 보낼 것.
소현세자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조선 16대 왕 인조의 맏아들 입니다.
성은 이(전주)씨고 이름은 ‘이왕’ 이다. 그리고 시호가 ‘소현’ 이고 왕이 되지 못했으니 지금 우리는 이 왕자를 소현세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출생은 1612년 (광해군 4년차) 사망은 1645년 33살의 나이로 생을 달리했다.
- 세자 책봉은 1625년 (인조 3년차)
인조와 소현세자
- 1627년 정묘호란때 강화도로 도망갔던 인조를 데리고 한양으로 복귀
- 1636년(인조 14년차) 병자호란 때 인조를 보위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
- 삼전도에서 항복한 후 9년동안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었음.
- 1645년 (인조 23) 억류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옴.
소현세자의 나라 사랑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던 기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삼전도 굴욕시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 파병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한다고 읖조렸으나, 이 후 조선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청나라를 배척하는 모습으로 외교적 마찰이 잦았다.
또 청나라 황제의 각종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인 포로의 송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원만하게 처리했다.
베이징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와 교류하며 서양 문물과 서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세자가 서학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소현세자 독살사건
이렇게 인조의 어려울 때 보필하고 선봉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적국의 인질까지 되는 등 아버지와 조국을 위해 애를 썻으나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한 해가 1645년 음력 2월인데 두 달 뒤 4월 26일에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소현세자가 병이 났는데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는 기록과 함께, 이세완의 아내가 염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 는 증언도 함께 기록이 되어 있다. (진짜 무서운 사서들 다 적어 놓음)
세자를 죽인 용의자는 크게 둘.
한명은 인조 또 한명은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튼 소용 조씨도 인조에게 이간질을 한 것이고, 인조는 속이 좁은데다 나름대로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있었는데 바로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했었는데 인조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병자호란 관련 영화
영화와 드라마
- 최종병기 활 2011년 8월 개봉
- 남한산성 2017년 10월 개봉
- 올빼미 2022년 11월 개봉
- 추노에서 오지호 배우가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을 지키는 역할
-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연인
이 외에도 소소하게 세현세자의 이야기는 드라마 곳곳에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이 뭔지 사도세자도 그렇고 친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던가 유배 보낸다던가 등등으로 장자가 평안하게 왕위를 물려 받은 예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